부셔져야만 하는 순간들

써먹는 독서

 만일 네가 입을 닫고 진실을 땅속에 묻는다 하더라도 그 진실은 계속 자랄 것이다. 그리고 엄청난 폭발력을 가질 때까지 점점 더 커지고 결국에는 터져버려서 자기가 나아가는 길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을 날려버릴 것이다.

 

- 에밀 졸라 -

 

 

 소설 <해리포터>의 저자 조앤 롤링은 대학교를 졸업한 뒤 7년 만에 결혼에 실패한 무직자이자 싱글맘인 신세가 되었다. 아이들을 먹여 살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기도 했다. 거의 노숙자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미국의 재즈 알토 색소폰 연주자인 찰리 파커는 십 대 시절에 무대 위에서 밴드의 다른 멤버들과 함께 마음껏 즐기며 연주한다고 생각했지만 밴드에서 쫓겨나면서 이런 상황은 끝나고 말았다.

 

 미국 대통령이었던 린든 존슨은 젊은 시절에 여자 하나를 두고 벌어진 다툼 때문에 힐카운티의 어떤 농장 일꾼에게 먼지가 나도록 두들겨 맞은 뒤에 '저 잘난 맛에 살던 독불장군'의 자기 이미지를 스스로 깨버렸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인생의 어떤 시점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나락에 떨어져 바닥을 친다.

 

 소설 <파이트 클럽>에서 주인공 잭은 자기가 살던 아파트가 폭파되고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 특히 그가 사랑하던 '모든 가구'들이 날아가 버린다. 나중에 드러나는 사실이지만 이런 짓을 저지른 사람은 잭 본인이었다. 그는 다중 인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인격 가운데 하나인 '타일러 더든'이 잭이 슬픈 무기력에서 깨어나도록 충격을 주려고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다. 그 결과 잭은 자기 인생의 완전히 다른 부분, 충동적이고 어두운 부분으로 빠져드는 여정을 시작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등장인물은 흔히 '카타바시스 katabasis'를 경험한다. 카타바시스는 '아래로 내려가기' 혹은 '밑바닥으로 떨어지기'이다. 이렇게 그들은 실패의 쓴잔을 마시고 어떤 경우에는 실제로 지하세계로 떨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나중에는 예전보다 훨씬 많은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세상으로 돌아온다. 오늘날 우리 역시 때로 지옥 같은 그 밑바닥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낸다.

 

 우리 주변에는 온갖 헛소리들이 윙윙거리고 수많은 것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정신을 산만하게 만든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에 대한,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거짓말들이 우리 주변에 둥둥 떠다닌다. 우리는 결코 되지 말아야 할 사람이 되고, 파괴적이고 끔찍한 행동을 예사롭게 한다. 이렇게 에고에 휘둘리는 건강하지 못한 상태가 점점 굳어져서 결국에는 고착된다. 그러다가 마침내 카타바시스를 경험한다.

 

 

 에고가 크면 클수록 추락은 한층 더 깊고 크다.

 

 굳이 그런 실패를 겪지 않으면 더 좋을 것이다. 누군가 슬쩍 옆구리를 찔러준 덕분에 자기의 잘못을 금방 알아차리고 멋지게 교정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조용한 경고만으로 헛된 환상을 물리칠 수 있다면, 앞길을 가로막아 서는 에고를 피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바람은 그저 바람일 뿐이다. 120년 전 한 목사는 굴욕을 참아내지 않고서는 겸손해질 수 없다고 했다. 이런 경험은 때로 장님의 눈을 뜰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사실 인생의 많은 의미 있는 변화들은 우리가 철저하게 파괴되는 순간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허상이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들에서 비롯된다. 나는 이것을 '파이트 클럽 순간들'이라고 부른다. 이런 순간들은 때로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우리가 겁에 질려서 감히 감행하지 못하는 변화의 촉매가 될 수 있다.

 

 당신 인생의 어떤 한순간을 선택해라. 현재 겪고 있는 순간이라도 상관없다. 다른 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상사에게 호되게 질책당하던 순간, 사랑했던 사람과 나란히 앉아 있던 순간, 결코 오지 않기를 바랐던 메시지가 도착했다고 알림이 울리던 순간, 악독한 채권자가 전화를 해오던 순간, 당신이 놀라서 아무 말로 하지 못한 채 자리에 털썩 주저앉게 되었던 순간,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모두 당신이 어떤 진실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순간들이다. 이에 직면하면 당신은 더는 무언가를 숨기거나 가장할 수 없게 된다.

 

 이때 온갖 의문이 마구 터져 나온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제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이게 정말 바닥일까? 아니면 앞으로도 더 추락할까? 내가 가진 문제들을 지적받았는데 어떻게 고쳐야 할까? 어떻게 하다가 나는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방치하고 말았을까? 어떻게 하면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할까?

 

 기존의 여러 사례를 놓고 보면 이런 일들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1. 거의 언제나 외부의 어떤 힘이나 개인에 의해서 일어난다.

 #2.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무서워서 감히 인정할 수 없었던 일들을 포함한다.

 #3. 완벽한 파괴에 이르고 나서야 비로소 커다란 발전과 개선이 시작된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이 기회를 충분히 이용할까? 물론 그렇지 않다. 에고가 문제를 일으키고도 우리가 그것을 개선하는 일을 가로막고 나서기 때문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부터 촉발된 2008년의 금융위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발가벗겨졌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지불능력 부족, 빚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 탐욕과 부도덕, 거짓 등이 세상에 민낯을 드러낸 순간이 바로 2008년 금융위기였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사건이 강력한 권고였지만 다른 어떤 사람들은 이 위기를 겪고도 몇 년 뒤에는 다시 예전의 그 모습으로 돌아갔다.

 

 

 소설가 헤밍웨이는 젊은 시절에 바닥까지 추락한 뒤에 얻은 깨달음을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에 남겼다. 그는 소설에 "세상은 모든 사람을 깨부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부서졌던 바로 그 자리에서 한층 더 강해진다. 그러나 그렇게 깨지지 않았던 사람들은 죽고 만다"라고 썼다.

 

 세상이 당신에게 진실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그 누구도 당신이 그 진실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하지는 못한다.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당신에게 달린 일이다. 우리에게는 너무도 친숙한 '부정 denial'으로 고개를 돌리고 그것을 따르고 싶은 유혹은 늘 매력적이다. 그러나 이 부정은 당신이 믿고 싶지 않은 것이 진실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한사코 거부하는 당신의 에고이다.

 

 심리학자들은 흔히 자기 중심주의가 위협받을 때 지구 상에서 가장 위험하다고 말한다. 명예에 흠집이 난 갱단의 조직원, 남들에게 거부당한 자아도취자, 약자를 괴롭히다가 결국 수치심을 느끼는 깡패, 악행이 드러난 사기꾼, 남의 이야기를 가져다 쓴 표절 작가 등이 그런 위험한 존재이다.

 

 당신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이렇게 궁지에 몰린 사람이 결코 아닐 것이다. 또한 그런 궁지로 자기 자신을 몰아넣기를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나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지? 이 사람들은 자기를 도대체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그 사람들이 모두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고 말 테야.

 

 이런 식으로 우리는 참을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던 행동을 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된다. 이것이 가장 순수하고 가장 독한 형태의 에고이다.

 

 사이클 선수 랜스 암스트롱은 부정을 저질렀지만 사태가 정말 나빠진 것은 이 부정행위가 대중에 공표되고 자기가 부정행위자라는 진실을 (설령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이라고 하더라도) 직면해야만 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는 모든 증거가 명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잘못을 계속 부인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계속해서 황폐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 혹은 자기에 대한 타인의 존경심을 잃어버리는 걸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더 끔찍한 짓을 생각하게 되고 상황을 악화시킨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 20절의 구절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크든 작든 간에 이런 행동을 한다. 그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은, 그것이 일상적인 자기기만을 폭로하는 것이든 혹은 진정으로 사악한 악행을 폭로하는 것이든 간에 결코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피한다고 해봐야 그 순간을 뒤로 늦추는 것일 뿐, 그 유예 기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좋지 않는 조짐이 있다면 이것과 직면해야 한다. 병을 발견했다면 치료해야 한다. 그런데 에고가 이것을 어렵게 만든다. 자기 삶에서 필요한 변화들을 유예하고 축소하고 또 이것을 정면으로 마주하기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게 훨씬 더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화는 비판에 귀를 기울이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설령 그 말들이 우리를 분노하게 하고 상처 주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렇다. 그런 비판의 말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며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자기가 행동을 성찰해야 한다.

 

 

 소설 <파이트 클럽>에서 주인공 잭은 최종적인 탈출구를 찾으려고 자기 아파트를 폭파한다. 이런 순간들은 우리에게도 필연적으로 나타나며 또 그 과정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자 당신은 어떻게 할 참인가. 고통을 감수하고 변화할 것인가? 아니면 부정할 것인가?

 

 미식축구계의 명감독이었던 빈스 롬바르디는 팀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일단 무릎을 꿇어봐야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 바닥을 친다는 것은 말만큼이나 대단한 일이다. 오바마 대통령도 두 차례의 힘들었던 임기가 마지막을 향해 다가가고 있을 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떨어지는 병 속에 들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떠올랐고, 살아났다. 그때의 해방감은 대단했다."

 

 할 수만 있다면 에고가 강요하는 환상의 고통을 단 한 차례도 겪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비통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거나 미쳐버리는 일이 없다면 더 낫겠다. 만일 그 싸움에서 지게 되면 우리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자기가 성취한 발전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 자신을 묻었던 구덩이 옆에 서서 그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구덩이에 남아 있는, 당신이 손에 피를 흘리면서 힘겹게 기어 나온 흔적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