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하고 흘러가게 두어라

써먹는 독서

적극적인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옳은 일을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과연 옳은 일이 생길 것인지

어떤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

- 괴 테 -

 

 

 동로마 제국의 벨리사리우스는 정말 위대한 장군임에도 불구하고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이름이 역사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무시되고 잊혀졌는지는 실제보다 엄청나게 저평가된 마셜 장군조차도 그에게 미안해서 고개를 숙여야 할 정도이다. 적어도 마셜이라는 이름은 '마셜 플랜'으로는 남아 있으니까 말이다.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아래 최고 사령관이었던 벨리사리우스는 적어도 세 차례에 걸쳐서 서구 문명을 지켜냈다. 로마 제국이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겼을 때 암흑의 시대이던 당시 벨리사리우스는 기독교인에게는 유일하게 밝은 빛이었다.

 

 그는 다라, 카르타고, 나폴리, 시실리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거센 바람이 일어나서 왕이 왕위를 포기하려고 할 때조차도 그는 얼마 되지 않는 근위대를 이끌고 수만 명의 적군과 맞서서 싸우면서 왕좌를 지켜냈다. 또 병력이 부족하고 자원이 변변찮았지만 놀라운 지도력을 발휘해서 몇 년 동안 방치되고 잃어버렸던 영토를 되찾기도 했다.

 

 다른 민족이 로마 제국을 차지한 뒤로 맨 처음으로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 로마를 지킨 장군도 바로 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그의 나이 마흔 살 이전에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응분의 보상을 받지 못했다. 공식적으로는 그 어떤 공적도 인정받지 못했다. 오히려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로부터 역모를 꾸민다는 의심을 끊임없이 받았다. 그가 거둔 승리들과 그가 바친 희생들은 어리석은 협정들과 잘못된 믿음 때문에 무효가 되어버렸고 지휘권조차 박탈당했다.

 

 그에게 유일하게 남아있던 호칭은 '왕립 마구간 사령관'이었는데, 그에게 모욕을 안겨주려는 황제의 의도였다. 그리고 그는 결국 모든 재산마저 빼앗겼다.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유스티니아누스가 그를 장님으로 만들었고 또 거리에서 구걸을 하며 목숨을 이어가도록 했다고 한다.

 

 역사가들과 학자들, 예술가들은 이런 그를 안타깝게 여겼고 그가 부당한 처우를 받았다고 수백 년 동안 주장했다. 이들은 이 위대하고 비범한 장군이 맞닥뜨려야만 했던 그 어리석음과 배은망덕과 부당함에 분노했다. 그런데 정작 벨리사리우스 본인은 이에 대해 단 한 마디도 불평하지 않았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리고 개인적인 편지에서조차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기회는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가 그 자리에 유혹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절대 권력의 모든 악덕(통제, 편집증, 이기심, 탐욕)에 탐닉해 있었지만 벨리사리우스에게서는 그런 것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로서는 어디까지나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다할 뿐이었다. 그는 그 일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성스러운 임무라고 믿었으며, 자기가 그 의무를 충실하게 해냈음을 알았고 옳은 일을 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족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모든 것을 올바르고도 완벽하게 처리해내지만 그 결과가 나쁠 때도 있다. 실패하고 존중받지 못하고, 질투의 대상이 되고 또 심지어 세상 사람들로부터 심드렁한 반응을 받기도 한다. 이때 무엇이 우리에게 동기부여를 하는지만을 생각하면 이런 반응은 치명적일 수 있다.

 

 우리 자신을 에고가 지배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1백 퍼센트 인정해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수용할 수 없다. 이것은 위험한 태도다. 어떤 사람이 맡은 프로젝트가 무엇이든 간에 그 일은 그 사람의 손을 떠나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판단되고 받아들여진다. 그때부터 그 일은 더는 그가 통제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좌우된다.

 

 벨리사리우스는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고 부하들을 이끌 수 있었다. 개인적인 윤리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지만 자기가 한 일이 남들에게서 높은 평가를 받을 것인지 혹은 역모의 의심을 불러일으킬 것인지는 통제할 수 없었다. 어떤 강력한 독재자라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관대하고 우호적으로 대하도록 만들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벨리사리우스는 어떤 특별한 미덕을 가지고 있었기에 옳은 일을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진리를 받아들였을까? 어떻게 조국과 신에 복무하고 자기 의무를 충실하게 다하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다는 태도를 취할 수 있었을까? 어떤 역경이든 간에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다고 믿었고 또 어떤 보상이든 간에 그저 덤일 뿐이라는 태도를 가질 수 있었을까?

 

 그의 행동은 훌륭한 일을 하고도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일로 처벌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더 빛이 난다. 옳은 일을 하고도 벌을 받는다면 화가 나는 게 당연하고, 우리는 그런 일이 본인이나 주변의 지인에게 일어날 때 당연히 분개한다. 그렇다면 벨리사리우스가 선택할 수 있었던 대안은 무엇이었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세운 목표를 추구하다 보면 그와 같은 시련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나중에 성과를 빼앗겨버릴 수 있는데도 열심히 일을 해야 할까?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시간과 에너지를 기꺼이 들여야 할까?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시간과 에너지를 기꺼이 들여야 할까? 우리가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에고가 전면에 나선다면 아마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가 설정한 대의에 충실하며 이를 위해 헌신하는 진보적인 활동가들을 생각해보자. 몇몇 지도자들은 자기가 추구하던 일이 결실을 맺기도 전에 암살당하거나 사회적으로 매장당한다. 그리고 '시대를 앞서가는' 대의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폄훼당하고 또 이를 맨 처음 주장한 사람들은 바싹바싹 마르고 또 시들어 버린다.

 

 사회의 기본적인 체계에 따르면 이 사람들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보상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그 일을 하지 말았어야 옳을까?

 

 에고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만일 당신의 태도가 이렇다면 당신은 힘든 시기를 어떻게 참고 버티어나갈 생각인가? 만일 당신이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라면 또 어떻게 할 것인가? 만일 시장이 잘못된 추세에 동조해서 움직인다면, 상사나 고객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좋은 일을 하는 것이 그것만으로 충분할 때 당신은 그렇게 하면 된다. 이게 훨씬 낫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무언가를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할 때 그 자체만으로도 자존감과 자긍심이 충만해진다면, 그 결과의 좋고 나쁨에 관계없이 충분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에고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보상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이따금씩 실제로 보상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칭찬을 받고 보상을 받고 나면 이 둘이 언제나 함께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른바 '충족되지 않는 고통스러운 기대감 expectation hangover'이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알렉산더 대왕과 유명한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디오게네스를 우연히 만난 알렉산더는 따스한 햇볕을 즐기며 누워 있는 그 앞으로 다가가서 ,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자기가 가난한 철학자에게 무엇을 해주면 좋을지 물었다. 알렉산더는 디오게네스가 그 어떤 것을 요구해도 들어줄 마음이었다. 그런덴 이 철학자가 바란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내가 쬐는 햇볕을 가리지 말고 비켜주시오."

 

 그로부터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알렉산더 대왕이 자기가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늘 인정받길 바랐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이런 일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고 당신은 여기에 대비해야 한다. 어쩌면 당신의 부모는 당신의 성공에 전혀 감동받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의 연인은 당신이 이룩한 일에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다. 투자가가 당신이 거둔 성과에 관심 없을 수도 있고 청중들이 박수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타인의 반응에 상관없이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이런 상황이나 조건이 우리를 움직이는 동기로 작동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벨리사리우스에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다. 마침내 무죄가 입증되었고 명예가 회복된 것이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늙은 장수였지만 로마 제국을 구하기에는 아직 늦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번 더 모반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의심을 받았다.

 

 이 불쌍한 장군을 노래한 롱펠로우의 유명한 시에서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조차 지참한 처지가 되었다. 앞을 보지 못하게 된 데다 거지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인은 벨리사리우스를 위대한 힘을 가진 사람으로 이야기한다.

 

 "이것 역시 참을 수 있노니,

 나는 여전히 벨리사리우스이노라!"

 

 당신은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할 수 있다. 무너뜨려야 할 대상이 되어 피해를 입을 수도 있고 충격적인 실패를 경험할 수도 있다. 당신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패배할 수 있다. 인생은 동화가 아니다.

 

 존 케네디 툴은 위대한 소설 <바보들의 결탁>을 완성했지만 출판사마다 퇴짜를 놓았다. 이 슬픈 소식에 가슴이 찢어졌던 소설가는 텅 빈 거리의 자동차 안에서 자살을 하고 말았다. 그가 죽은 뒤에 그의 어머니가 이 원고를 발견하고 끈질게 노력해서 이 원고는 그가 죽은 지 11년 만에 출판되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퓰리처상까지 받는 성공을 거두었다.

 

 툴이 출판사에 줬던 원고와 그의 어머니가 줬던 원고가 달랐을까? 다르지 않았다. 동일한 소설의 동일한 원고였다. 만약 툴이 타인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았더라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고, 대신 우리는 그의 고통스러운 사례에서 인생의 수많은 굴곡들이 얼마나 우연적인 것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어떤 것의 가치 유무를 외부적인 요소들이 결정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판단과 결정은 언제나 우리 자신이 내려야 한다. 마르쿠스 아우엘리우스는 야망은 자기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들이 말하거나 실천하는 것에 묶는 것이고 온전함은 그것을 자기 자신의 행동에다 묶는 것이라고 했다.

 

 세상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에 줄기차게 계속 무언가를 바라고 또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분노나 지금보다 더 나쁜 상황으로 내모는 행위로 이어질 뿐이다.

 

 당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고 그 일을 잘해라. 그런 다음 흘러가게 두고 신의 뜻을 기다려라. 필요한 것은 그것뿐이다. 인정받고 보상받는 것은 그저 부수적인 요소일 뿐이다. 그저 일을 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